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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시발점 ‘2.28 대구민주운동’

反자유당 선봉…“시작은 ‘보수의 심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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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 기자
기사입력 2018/02/28 [10:34]

현시점에서 대한민국의 제 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텃밭으로 불리는 지역은 바로 대구광역시다. TK 출신이었던 박정희로부터 이어진 지지기반은 동일 지역 출신인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며 공고해졌고, 이후 이명박, 박근혜까지 보수 성향의 대통령을 연이어 배출하면서 ‘대한민국 보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심지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탄핵정국에서도 TK지역에서는 대통령과 자유한국당의 지지도가 상대적으로 높을 만큼 거의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곳이다. 하지만 대구는 원래 그 어느지역보다 민주화와 적폐청산을 외치던 ‘反 자유당’지역이었다. 우리나라 첫 민주혁명인 4.19의 시발점이 된 2.28 민주운동 지역이 바로 대구였기 때문이다.

 


 

장면 후보 연설일 다가오자 학생 일요일 출석 강요해

자유당 정권 ‘야만적이고 폭압적’ 간계 간파한 학생들

“학생들 북한에 조종당하고 있다”며 종북몰이한 정권

‘3·15마산의거, 4·19혁명, 4·26이승만 하야’로 이어져

 

▲ 2월28일 집회 참여당시 부상당한 학생 <사진=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은 이승만 자유당 독재정권의 횡포와 부패, 실정이 절정에 다다르며 국민들의 생활과 감정이 ‘못살겠다 갈아보자’고 할 만큼 빈곤과 불법적 인권유린이 극에 달한 시대 상황에서 일어난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자발적이고 조직적으로 일으킨 민주적 저항운동이다.

    

뜨거웠던 일요일

 

당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을 했고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를 맞아 정권의 부패와 부정으로 민심이 이반했음을 알고도 부정선거로 집권을 연장할 것을 기도했다.

 

이 같은 자유당의 장기 집권을 위한 부정 음모가 진행되면서 정·부통령 선거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 수성천변에서 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선거 연설회가 계획됐다.

 

당시 국민들 사이엔 말로 표현은 못했지만 자유당 정권의 악정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소리없는 여론이 전국을 메아리쳤고 대통령 선거엔 야당 후보인 조병옥 박사에 초점이 모였으나 불행하게도 조 박사가 서거하는 바람에 부통령 후보인 장박사가 모든 여망을 걸머졌다. 이 때문에 일요일인 그날의 수성천변 유세는 대구 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전국의 이목이 집중돼 자유당 정권의 감시에도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됐다.

    

선거의 패배를 예감한 자유당 정권은 이성을 잃고 학생들이 유세장으로 몰릴 것을 우려한 나머지 대구 시내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 등교를 지시했고, 학교 당국은 온갖 핑계로 일요 등교를 강행했다. 어린 학생들마저 정치적 도구로 희생시키려 했던 것이다. 학교에 따라 갑자기 임시시험을 친다고 했고, 단체 영화 관람이나 토끼 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일요 등교를 종용했다.

 

그러나 이 같은 자유당 정권의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간계를 간파한 학생들은 불의에 몸을 떨었다.

 

이에 1960년 2월27일 오후 대구 동인동 이대우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 집에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부속고 학생 8명은 부당한 일요등교 지시에 항의를 하기 위해 시위를 조직했고,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도 작성하며 시위를 준비했다.

 

그리고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계획했던 대로 당국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이 같은 자유당 정권의 불법과 부정을 규탄하는 집회로 바꾸어 궐기했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당시 인구가 밀집했던 중앙통을 거쳐 경북도청과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 당사, 경북지사 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악행을 규탄했다.

 

지난 2월28일 오후 12시 55분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 이대우 등이 조회단에 올라 격앙된 목소리로 결의문을 읽었다.

 

이들은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에 흥분이 고조된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고 손뼉을 쳤다. 반독재의 횃불은 이처럼 대구에서 처음 불타올랐다.

 

학생 800여 명이 반월당, 중앙대로를 거쳐 경북도청(현 대구시청별관, 구 경북도청)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며 시위대는 커졌고 도중에 유세장으로 가던 장면 박사를 만났을 땐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대구시민들도 경찰에 쫓겨 도피하는 학생들을 숨겨주는 등 지지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2·28은 당시 참여주체가 고등학생들이었지만 그 시대의 부모, 형제 가족의 암묵적 동의와 대구시민의 시대정신을 담은 반독재 민주운동의 분출이었다.

    

▲ 대구 시내를 행진하고 있는 학생들 <사진=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대구 학생의 봉기

 

이 시위는 고교생들이 주체이고, 계획적 조직 시위의 민족운동 요건을 갖춘 학생운동이었다. 우리 역사상 6.10 만세 사건, 광주 학생운동에 이은 의거로 전후 학생운동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특히 4·19 혁명의 도화선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한일 수교 반대와 그 이후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시위에 참여한 고등학교는 다음과 같다. ▲경북고등학교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대구고등학교 ▲대구상원고등학교 ▲대구자연과학고등학교(구 대구농업고등학교) ▲대구공업고등학교 ▲경북여자고등학교 ▲대구여자고등학교

 

이처럼 대구는 곧 1200여 명 학생들의 ‘민주화 함성’ 도가니로 변했다. 이때는 발췌 개헌(1952년), 사사오입 개헌(1954년), 진보당수 처형(1958년) 등 자유당 정권 실정에 분노하고, 대통령 선거(3월 15일)가 다가온 시기였다.

 

실제로 당시 오림근 경상북도지사는 학생들에게 “이놈들 전부 공산당”이라고 한 반면, 시민들은 구타당하는 학생을 경찰에게 달려들어 말리고 박수하고, 치맛자락에 모자를 감춰 학생을 숨겨주는 부인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한 시민은 “교사들도 마지못해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는지 도와주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이로인해 숱한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어 고통을 받았고 교사들도 모진 책임추궁을 받았다. 독재에 움츠렸던 언론도 마침내 2·28대구학생의거를 보도함으로써 전국의 학생들이 잇따라 궐기와 시위에 나섰다. 당시 아무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고, 기성세대들도 말 못했던 공포분위기를 고등학생들이 처음으로 자발적이고 조직적으로 민주적 의사표시를 한 것이었다.

 

총 1200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를 했고 그 중 1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 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했다.

 

사실 이 사태는 긴 독재로 거만해졌던 자유당이 오판한 것도 한몫했다. 먼저 일요일 등교 근거가 말도 안되는 구실이었다. 아무리 광복한 지 15여년밖에 안된 시대에 어린 학생들이라지만, 정치에 관해서는 언론에서는 많이 알려진 바 있었다.

 

물론 당시 야당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던 시대였고 공포분위기에 어른들도 나서지 못하는 때 였기는 하지만 도를 넘어서고 선을 넘으면 결국 문제가 생기는건 당연한 법이다. 결국 어린학생들이 들고 일어났고 처음으로 어른들을 움직여 결국 시민들도 어린학생들을 도와주기까지 한 것이다. 실제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이들은 교사들도 도와줬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당국에서는 이를 공산당 사주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 일축하면서 학생의 시위를 경찰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켰다. 당시 이강학 치안국장은 “학생들이 북한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상술했다 시피 오림근 도지사도 마찬가지로 종북몰이를 했다.

 

결국 자유당의 무리한 시도로 인해 이 민주운동은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된 사건이 됐으며, 이 사건의 영향은 엄청났다. 공포분위기 때문에 나서지 못했던 어른들도 움직이게 했으며 당시 연행했던 경찰들도 이들을 많이 풀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거기다가 애당초 대구지역은 야당 지지 성향이 매우 짙었던 지역이었고, 반 자유당 성향이 아주 강한 지역이었다.

 

이같은 2·28 대구학생민주운동은 광야를 태우는 한 알의 불씨가 되어 들불처럼 번져갔고, 3·15 마산의거, 4·19 혁명, 4·26 이승만대통령 하야로 이어져 마침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이 나라 최초의 민권 민주주의 혁명인 4월 혁명을 완수했다.

    

민주운동의 시초

 

이처럼 2.28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해방 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학생데모는 대구 2.28학생 시위가 최초였기 때문이다. 50년대 후반 이승만 정부는 각종 선거 부정에 얼룩진 독재정부였다.

 

당시 국회의원 선거는 무리를 나누어 투표한 내용을 조장에게 공개 한 후 투표함에 넣는 조직적인 부정선거와 개표시에는 갑자기 고의적으로 전기 불을 정전하여 어두운 틈을 타서 투표함을 바꿔치기하는 올빼미작전, 그리고 당선 유력한 야당후보의 지지 표를 무효화 시키는 등 부정 개표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대학생들과 기성인들은 꿈쩍 하지 않았다.

 

이와같이 당시에 모든 국민들이 부정과 불의에 침묵하고 있을 때 대구의 어린 고등학생들이 용기 있게 정의를 요구 하면서 민주 화로에 불을 지핀 것이다. 대구에서 지핀 이 불은 마산의 3.15 와 서울의 4.19로 확산 되어 마침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발화점이 됐다.

 

2·28 학생운동이 자유당 독재정권의 타도와 같은 구체적인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또 자신들의 행동이 학생혁명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계산속에서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2·28 학생운동이 단순히 일요등교에 따른 단순한 순간적인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뚜렷한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시대의식의 반영으로 일어났으며, 현대 학생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민주주의 실천운동이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2.28 학생운동의 전개과정에서 학생대표들은 시위를 위해 하루전날부터 구호를 다듬고 계획을 세웠으며 당시에 외쳤던 구호가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비판적 목적의식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임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그 후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고등학생들의 시위나 4.19혁명은 2.28에서 비롯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또한 어떤 학자는 2.28이 한국 학생운동사의 위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학생운동은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의 한국 독립운동에서 광복 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1960년대부터는 민주화운동으로 전개됐다.

 

이때 2·28이 1960년부터 30여 년간 계속되는 독재정치와 부정부패에 대응한 학생중심의 민주화운동의 출발점으로 본다는 것이다.

 

결국 2·28민주운동은 독재와 부정에 저항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대구 시민정신의 표출이었고, 국가의 민주적 정통성을 심는 선구적 역할을 한 자랑스런 대구의 역사인 것이다.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의 한 관계자는 “100년 전 대구에서 일어나 일제의 경제침탈에 맞서 전국민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킨 국채보상운동의 반외세 자주화 정신과 함께, 대구·경북 시도민, 영남인의 자랑스런 시대정신으로 부활, 승화 시켜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penfr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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