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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건-10月] 박정희 독재 선포 ‘10월 유신’

“대한민국 민주주의 박살냈던 최악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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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 기자 2017-10-17


대한민국 헌정사를 살펴보면 총 9차례 헌법 개정, 즉 개헌이 있었다. 이중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헌법은 지난 1987년 10월 29일 공포된 제6공화국 헌법으로,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린 6월 항쟁으로 인해 개정된 헌법이다. 일명 87년 체제라 불린다. 이 헌법으로 인해 직선제 개헌을 얻어냈으며, 기나긴 군사 독재정권을 끝낸 의미있는 헌법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직선제를 얻어내기 위한 투쟁의 역사는 길었다. 국민의 참정권 마저 없어진 독재의 본격적인 시작은 지난 1972년 10월17일 박정희 정권 하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제 7차 개헌’ 사태인 ‘유신’ 사건이다.

 


 

전두환 정권까지 이어진 반민주적 헌법 개정한 박정희

김대중 등 야권의 도약 및 대미관계 악화도 영향 끼쳐

개헌 투표시 심각한 탄압…북한 정권과 다름없는 선거

극우 인사도 지적하는 최악 실정…정권 정당성 사라져

 

▲ 유신쿠데타로 장기집권의 길을 연 박정희가 1972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 투표를 거쳐 대통령에 취임하는 모습. 

 

[사건의 내막=김범준 기자] ‘10월 유신’으로 일컬어지는 박정희 정권 하의 ‘7차 개헌’은 지난 1972년 10월17일 시도된다.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10월 유신’은 대한민국에서 발생했던 헌법 개정을 가장한 친위 쿠데타로 볼 수 있는 행위다. 이는 박정희가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의 비상조치 아래 위헌적 절차에 의해 제3공화국 헌법을 파괴했기 때문으로서, 자신의 종신집권을 위해서 만든 반민주적 헌법이라는 이유가 크다. 누구나가 동의하는 박정희 정권의 실책이며,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어두운 시대를 보여주는 사건 중의 하나다. 또한 이후 전두환 까지 이어진 독재 정치의 신호탄이기도 한 법이였다.

 

그리고 박정희는 이런 독재를 ‘한국식 민주주의’라며(‘우리식’이라는 단어도 자주 사용)포장했다. 이로인해 야당의 유력 정치인이자 민주화 운동가였던 김대중과 김영삼의 대권도전과 민주화는 이로 인해 난관을 맞게 된다.

    

유신독재의 서막

 

지난 1969년, 이른바 ‘3선 개헌’으로 박정희의 대통령 선거 출마가 가능하게 되어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된 박정희는 당시 국가예산의 1/7에 해당하는 거액의 선거자금을 썼음에도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에게 고전했다. 야권 후보로 나선 김대중은 이 당시 온갖 부정선거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40% 중반의 득표율을 획득하며 선전했다.

 

비록 박정희는 3선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선거자금을 대대적으로 뿌린 것에 비하면 예상보다 부진했다는 평을 들었고 박정희 자신도 막상 개표에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의 116만표에 비하면 표차가 상당히 축소 된데다가 득표율에서도 예상보다 큰 차이가 나지 않아 이에 실망감을 표할 정도였다.

 

이어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진산이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 장덕진에게 선거구를 넘겨주려고 하다가 ‘진산 파동’이 일어났고, 진산 파동은 조기에 수습되기는 했지만 그 여파로 선거기간 내내 신민당이 불리했지만 예상을 깨고 신민당이 개헌 저지선을 훌쩍넘는 의석을 확보하며 선전했고,(89석/204석) 여당은 과반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서울과 부산, 대구에서 각각 1석, 2석, 1석씩만을 확보하는 대패를 기록했다. 또한 여타 도시 지역에서도 참패나 다름없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계속 이 헌법으로 연임하기에는 이 속이 뻔히 보이는 짓에 대해 야당과 국민의 반발이 너무 거셀 것은 분명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유신 헌법 개정을 계획하게 된다.

 

그러나 단지 김대중 등 야권세력의 도약만으로 유신을 결정한 게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국제정제를 보면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5년 안에 미군철수를 통보하고, 실제로 미7사단을 71년 초에 일방적으로 철수시켰다고 한다. 더구나 72년엔 닉슨이 갑자기 중국을 방문 우호적으로 노선변경을 했다.

 

이에 당황한 박정희 정부가 이후락 중정부장을 북한으로 보내 서로 오판하지 말자며 협약한게 7.4 남북 공동 성명이라는 것이다. 닉슨은 베트남에서도 미군을 철수시켜서 공산화를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으며 당시 베트남과 쌍둥이 국가라고 해도 무방한 한국입장에선 상당한 위기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북한 군사력은 남한의 2배 위였기에 유신의 원인 중 하나는 닉슨의 미군 철수 통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우선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일명 국가보위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1972년 10월17일 오후 7시 박정희는 전격적으로 대통령 특별선언과 함께 비상조치를 선포했다.

 

비상조치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 조항의 기능은 비상 국무 회의에 의하여 수행되며, 비상 국무 회의 기능은 현행 헌법의 국무 회의가 수행한다. ▲비상 국무 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 투표에 붙여 확정시킨다. ▲헌법 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 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 질서를 정상화시킨다.

 

당시 박정희는 이같은 10월17일 특별선언을 선포한 자리에서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안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 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 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 두는 바입니다”라는 대국민 협박성 발언을 했다. 즉, 통일을 가지고 새헌법(유신헌법)은 통일을 위한 헌법이니, 이것에 반대하는 것은 남북통일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18일엔 다음과 같은 계엄포고 1호를 발표한다. ▲모든 정치 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한다. 정치 활동 목적이 아닌 옥내외 집회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 단, 관혼상제와 의례적인 비정치적 종교 행사의 경우는 예외로 한다.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한다. ▲각 대학은 당분간 휴교 조치한다. ▲정당한 이유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행위를 금한다. ▲유언비어의 날조 및 유포를 금한다. ▲야간 통행 금지는 종전대로 시행한다.

    

▲ ‘10월 유신’에 대한 홍보 포스터. 

 

심각한 탄압

 

과정은 당연히 비 민주적으로 진행됐다. 당시 헌법에는 분명히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군대를 동원해서 강제로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과 정당활동을 중단시켰다.

 

즉 군대를 동원해서 초법적인 조치를 취하는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 뒤 조윤형, 이종남, 조연하, 김녹영, 김경인, 최형우, 이세규, 박종률, 강근호, 나석호, 류갑종, 김한수, 김상현 등 야당 국회의원들을 감금한 뒤 고문했다. 장소는 육군보안사령부, 6관구 헌병중대, 5관구 헌병대 같은 곳들이다. 고문행위에는 침대각목으로 3일 동안 전신구타하기, 알몸에다 구타하기, 찬물을 끼얹고 링거 주사를 준 다음 구타하기, 거꾸로 매달아 난타하기, 물고문 따위 등이다.

 

유신헌법안 찬반투표는 그뒤인 11월21일에 이뤄졌으나 이미 제도정치권은 물론 언론과 대학, 종교계 등 모든 반대세력을 살벌하게 탄압해서 강제로 침묵시켜놓은 상태에서 치러진 투표였다. 그리고 이 찬반투표조차도 부정 투성이었다. 실제로 당시 선거관리위원 이 모 씨는 부정투표함을 발견하고 선관위원장에게 보고했는데, 이후 사퇴압력을 받다가 결국 해직당했으며 12월에청량리 정신병원에 끌려가 강제 입원당했다가 3월에 퇴원했다.

 

국민투표를 통과했기 때문에 독재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것은 온갖 절차적 위법이 있더라도 투표만 통과하면 합법이라는 논리가 된다. 그런 논리면 북한도 형식적인 찬반투표를 하는데 북한도 독재국가가 아니라는 논리가 된다.

 

게다가 일반적인 개헌이라면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 심의와 의결을 거쳐야 하는데, 국회를 해산시키고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이 국무회의에서 헌법을 심의하고 통과시켰다. 이미 실질적 측면은 고사하고 절차적 타당성마저 상실한 것이다.

 

더군다나 국민투표는 계엄령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유엔의 감시 하에 이루어졌기에 강압 등 부정한 선거는 아니었지만 계엄령 하에서 유신헌법 개정안에 대해 반대하는 일체의 토론이나 집회, 언론보도는 모두 금지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투표에 참여하는 국민들은 투표가 의미하는 정확한 내용과 문제점에 대해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투표 당시 있었던 일화 중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섬마을 주민들이 투표를 하기 위해선 육지로 와야 하는데, 풍랑으로 뱃길이 끊기자 바다를 헤엄쳐서 왔다.’ 아무리 투표가 중요한 행사라고 해도 11월 중순이란 초겨울의 풍랑이 이는 바다를 헤엄쳐서 올 정도였다면 정상이 아니다.

 

그리고 아예 정치활동을 금지시켜, 사회적으로 ‘유신 반대’라는 의견을 낼 수 없게 틀어막아 버리고 국민 투표를 한 것이다. 또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각종 언론에는 10월 유신을 지지하자는 표어가 계속해서 올라왔고, 유신에 대한 지지 투표를 하자는 국정 홍보물들이 쏟아졌다. 이 정도면 시작부터 공산당 투표나 다름없는 행각이다.

 

사실 이 유신개헌의 국민투표 통과에는 7.4 남북 공동 성명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왜 주요 정책결정기관 이름자체가 ‘통일주체국민회의’였다. 당시를 회상하는 이들을 보면 이 때 당연히 통일이 되는 줄 알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공동선언으로 조성된 통일 분위기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로, 1972년 사회주의 헌법을 선포하고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국가주석을 신설했던 것이다.

 

즉, 이같은 비 민주적인 의사결정과정으로 인해, 당시 투표율은 91.9%였고, 찬성 92.2% 이상의 압도적 지지율을 보였다. 지역별로는 80%대를 기록한 서울과 부산을 제외하면 나머지 지역에서는 모두 90%를 넘겼다.

    

민주파괴 내용

 

이같은 쿠데타 행위로 제정된 유신헌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 직선제의 폐지 및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 선거.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 ▲대통령에게 헌법 효력까지도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 부여. ▲국회 해산권 및 모든 법관 임명권을 대통령이 갖도록 하여 대통령이 3권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보장.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 제한을 철폐하여 종신 집권을 가능케 함.

 

이처럼 법안의 주요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뽑는 대통령 간선제로의 변경,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하는 유신정우회, 헌법의 기본권을 중단할 긴급조치등을 시행할 권리 등이 있었다. 게다가 모든 법관(판사)의 임명권을 대통령이 가지게 되는 등, 사실상 대통령 1인이 혼자서 입법, 행정, 사법을 모두 맡게 된 것이다.

 

또한 대통령 임기도 6년으로 늘리고 중임 및 연임 제한도 폐지해서, 사실상 종신집권이 가능해졌다. 거기에 더해서 구속적부심사제 폐지, 이미 위헌 판결을 받은, 군인, 군무원 등의 이중배상청구 금지를 헌법 조항으로 신설, 국회의 대통령과 행정부에 대한 중요한 견제수단인 국정감사 그리고 국정조사 권한의 폐지에 더불어, 대통령에게 헌법개정권과 국회 해산권도 부여하였다. 게다가 유신 헌법은 대통령을 행정, 입법, 사법 삼부위에 위치하는 국가 영도자라고 규정하였다. 나치의 히틀러와 똑같은 종신총통제였던 것이다.

 

이로서 3선 출마 때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라던 박정희의 연설과, “박정희가 이번에도 집권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입니다”라던 김대중의 연설 모두가 맞아떨어지게 되었다. 국민과 야당은 이것에 크게 반발했지만 계엄령과 긴급조치를 통해 반대파들을 잠재웠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게 김대중 납치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장준하 의문사 사건 등을 들 수 있겠다.

    

▲ 정당성을 상실한 유신정권은, 김재규의 총탄에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종말을 맞게 된다. 

 

헌정사의 참사

 

결국 이같은 내용의 유신헌법은 수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우익인사로 유명한 조갑제마저도 유신 헌법에 대해서는 강제 정권 영구화로 인해 한국이 보수주의자들이 그토록 욕하는 북한과 동급의 막장으로 떨어졌다는 점에서 욕먹어도 할 말이 없다는 식의 한발 물러선 발언을 한 바 있다. 또한 조갑제는 2008년 아우인 박지만과 재산싸움을 벌이던 박근령을 인터뷰할 때도 여러 말을 하던 도중에 박정희의 선거생략과 영구정권화에 대하여 독재라고 욕먹어도 할 수 없지 않냐고 비판했다. 아버지가 민주주의의 투사라고 옹호하던 박근령도 선거를 생략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는 기자의 말에 반론하지 못했다.

 

이게 어느 정도인지는 당시 유신 정권을 비판하는 지하 유인물 중 하나가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제9대 대통령 선거가 체육관 선거로 진행되자, 재야 민주 단체인 한국인권운동협의회에서 이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어서 뿌렸다. 당시 학교의 ‘반공 교과서’에서는 북한의 선거제도에 대해 설명하며 후보는 한명이고 실질적으로 반대를 할 수 없으며, 항상 99% 이상의 투표율 및 찬성표가 나온다고 비판했다. 이 유인물에서는 앞면에 이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써 놓은 뒤, 바로 뒷면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99%의 투표율과 찬성표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당시의 신문 기사를 그대로 써 놓았다.

 

반공 교과서와 신문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옮겼기 때문에, 정부는 유인물 제작자들을 긴급조치 9호로 처벌할 수가 없었다. 유신 시기 제작되었던 지하 유인물들 중 제작자가 처벌받지 않은 사례는 이것이 유일하다. 박정희 정권을 옹호하던 보수인사들도 “유신시대에 나온 수많은 지하 유인물 중에서 이것만큼 간결하고 탁월하며 뚜렷한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은 없다”라고 높이 평가할 정도다.

 

무엇보다 유신헌법은 정치 전략으로도 심각한 문제였는데, 완벽한 자살골이었다는 평이다.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으로 이전 정권을 엎긴 했어도, 그 뒤에는 비록 관권과 금권이 판을 치긴 했어도 일단 야당후보들과 공개적인 경쟁 끝에 승리하면서 집권했기 때문에 군부독재라는 내용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쿠데타로 등장한 군부독재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서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고,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세력과 야당의 목소리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러나 유신으로 선거를 무시하며 집권함으로써 박정희는 이 정당성을 완전히 날려먹는다. 그 말인즉슨 박정희가 어차피 뭘 해도 찍어 줄 골수 지지층을 제외한 나머지 층을 죄다 등 돌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민주공화당의 경우 내부적으로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불만을 가지고 차기를 노리는 움직임까지 나오는 등 박정희의 리더십이 약해진 가운데, 유신으로 인해 박정희 친위세력과 그 외 세력으로 나뉘고 또 유신으로 인한 지지율 폭락까지 겹치면서 정당으로써의 생존 가능성이 바닥을 치게 된다.

 

유신 전까지만 해도 민주공화당은 어느 정도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만약 약속대로 박정희가 물러나고 공화당에서 차기 후보가 나와서 박정희가 지원하는 형태로 갔다면 대통령은 못해도 당의 존립은 가능했을 것이다.

 

박정희 본인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일종의 전관예우를 받으며 요직에 앉아 있었으면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으며 영향력도 나름대로 행사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유신체제를 시행함으로 인해 박정희는 빼도박도 못할 흑역사를 찍게 되었고, 그 결과 당과 본인의 미래도 불투명해지게 된다.

 

그리고 지난 1979년 10월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하면서, 유신 정권은 종말을 맺게 된다.

    

penfree1@hanmail.net

기사입력 :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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