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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건-10月]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

‘늑장대처·과적·오보’까지…“역사는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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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 기자 2017-10-10


지난 2014년 4월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한국 참사의 역사’를 새로 쓸 만큼 충격으로 다가왔다. 각종 인재가 겹치고 겹쳐서 발생한 사고인 세월호 참사는, 2년이 훌쩍 지난 아직까지도 진상조사 조차 마무리 되지 않았을 정도로 처참한 참사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세월호 참사는 갑작스레 다가온 것이 아니다. 이와 비슷한 규모의 참사가 이미 20년 전 발생했었기 때문이다. ‘성수대교 붕괴’와 ‘삼풍 백화점 붕괴’ 등으로 유명했던 사고 공화국 김영삼 정부 당시, 연이은 참사의 스타트를 끊었던 1993년 10월10일 ‘서해 훼리호 참사’가 그것이다.

 


 

전형적 인재 훼리호 사고…위험 요인에도 운항 강행

늦어진 구조…안전 요원 부족에 구명 장비까지 문제

참사 불구 정치권 선박안전 논의 전무…반복된 참사

언론의 오보 릴레이도 판박이…유족들 마음만 ‘피멍’

 

▲ 서해 훼리호 참사는 292명이 사망한 초대형 해상 참사였다. <사진=유투브 채널 ‘버블껌’ 캡처>  

 

[사건의 내막=김범준 기자] 지난 1993년 10월10일 오전, 전라북도 부안군에 위치한 위도의 선착장에는 300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일요일이었던 이날은 전날까지 낚시 등으로 관광을 왔던 외지인들이 돌아가기 위해 ‘하루 왕복 1회’ 밖에 없었던 배를 타러 몰려왔기 때문이다.

 

승객들이 탑승할 배편은 ‘서해 훼리호’(페리호)로 총 탑승 인원이 200 여명이 조금 넘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선박(110톤급)이었다. 만선을 훌쩍 넘어서 불안한 운행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조건으로서 참사는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 300여명이 넘는 승객과 승무원 9명, 총 362명을 태우고 위도항(파장금항) 출항해 부안군 변산면 격포항으로 항해 중이던 서해 훼리호는 10시 10분경 전북 부안군 위도면 임수도 북서쪽 3km해상 부근 해상에서 파도에 강타당하며 순식간에 침몰했다.

 

이같은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는 292명의 사망자를 내며 또 다른 해양참사인 ‘남영호 침몰사고’(326명 사망), 세월호 참사(304명 사망)와 함께 ‘초대형 해양 참사’로 기록되게 됐다.

    

전형적인 인재

 

전문가들은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의 원인으로 다양한 원인들을 제기하지만, ‘인재’(人災)였다는 점은 모두가 부인하지 않는다.

 

서해 훼리호는 선박 출항 당시 기상여건이 매우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출항을 감행한 것과 무리한 기기 조작이 사고의 원인으로 분석되었다. 또한 짐이 배 앞부분에만 가득 실려 있었기에 여객선 자체가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해 뒤뚱거리는 상태였고, 이 상황에서 무리한 키 조작이 결국 배가 뒤집혔다고 알려졌는데 다른 원인을 분석한 당시 현지 해경 분석도 있다.

 

실제로 사고 당일 기상청에서도 ‘파도가 높고 강풍이 불며 돌풍이 예상되므로 항해 선박의 주의를 요한다’는 방송을 내보냈고, 생존자들의 증언 또한 당초 여객선이 정상 운항을 할 수 있는 기상여건이 아니었다고 한다. 출항 당시 초당 10m~14m로 부는 북서풍 때문에 높이가 무려 2~3m에 이르는 파도가 치는 상황이었는지라 여객선이 출항해서는 안 되는 날씨였다.

 

이 때문에 출항 후 얼마 되지 않아 좌현 정횡(배 왼쪽 중앙) 부분으로 닥치는 파도가 예상보다 높아지자 선장이 뱃머리로 파도를 받기 위해 침로를 60 회전하여 시속 12노트로 진행하다가 임수도 북서쪽 1.9마일 지점에서 원항로로 복귀하기 위해 남쪽으로 40도 가량 변침하는 등 기기를 무리하게 조작하다가 순식간에 침몰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원 외에 무려 141명이나 초과 승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감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래는 이날 좋지 않은 날씨 탓에 운항하지 않을 예정이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항하라고 강요했었다고 한다.

    

예고된 참사

 

이처럼 ‘서해 훼리호 사고’는 전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부터 주말에는 계속 초과 승선한 채로 운항했기 때문이다. 사실 서해 훼리호가 처음 운항할 당시에는 주말에도 이용객이 얼마 없었다고 한다. 위도와 육지간 왕래객이 얼마 없는 탓에 하루에 왕복 1차례 운행해도 적자나는 상황이었던 것. 하지만, 이 수단이 위도에서 육지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에 운항을 멈출 순 없었고, 결국 농어촌버스처럼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겨우겨우 운영하던 노선이었다. 즉, 서해 훼리호가 운행하던 ‘부안-위도’ 노선은 ‘낙도 보조 항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도는 ‘낙도 보조항로’라기에는 점점 관광객이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경제적 여건이 급속하게 좋아지기 시작한 80년대 후반부터 위도가 낚시 명소로 인기를 끌자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낚시꾼들덕에 이용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주말에는 몇백명씩 찾아오다보니 더 이상 왕복 1회 운행으론 버틸 수 없었다. 서해 훼리호의 정원은 221명이었는데 주말마다 찾아오는 관광객은 이를 압도했기 때문에 계속 초과승선 시킬 수밖에 없었고, 사고 일어나기 몇달 전부터는 결국 이곳을 찾아오던 관광객과 위도 주민들은 운항 횟수를 증편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낙도 보조 항로’로서 보조금 받는 영세업체라며 증편 허가를 거부했다. 결국 주말 만이라도 증편해달라고 했더니 이마저도 거부하며 탁상행정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서해 훼리호’ 운영업체인 ‘(주)군산서해훼리’의 의지 문제일 수도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굳이 정원초과로 운항해도 그때까진 사고가 나지 않았었고, 증편하면 운항비가 더 들기 때문에 증편의 필요를 못 느껴 적극적인 운항의지를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같은 복합적인 문제때문에 운항 횟수가 늘지 않았고, 그 상태로 늘어만가는 많은 관광객을 실어나르게 됐던 것이다.

 

게다가 이날 서해 훼리호에는 승객들이 141명이나 추가 승선 할 수 밖에 없었던 결정적 원인이 있었다. 바로, 참사 당일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고 여객선 승객들 가운데는 직장에서 단체로 여행을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는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이야기로 ‘서해 훼리호’가 왕복 1회 운항하는 탓에 그 선박을 놓치면 꼼짝없이 무조건 휴가내서 하루 더 있다 와야했다. 결국 사람이 많았어도 승객들은 출항을 강요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같은 승객들은 대부분 주말을 이용해 바다낚시를 즐기러 온 낚시꾼들로, 구명조끼 등 안전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못해 피해가 크게 늘어나 버렸다.

 

게다가 이날 날씨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위도 인근 해상에는 어떠한 주의보도 내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천재지변에 의해 발이 묶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강요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또한 문제는 증가한 승객 뿐만이 아니었다. 마침 당시는 곧 김장철이 다가오는 가을이라 위도 주민들이 만든 액젓을 내다 팔기 위해 수 톤의 멸치액젓까지 서해 훼리호에 실었다. 안 그래도 정원보다 141명이나 더 탔는데 무거운 액젓까지 실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초과 승선 및 과적의 관행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고 결국 20년 후 ‘세월호 참사’라는 더 큰 비극이 일어났다.

 

이처럼 크게 초과한 승객과 화물, 그리고 날씨까지 안 좋았다는 최악의 상황으로 ‘서해 훼리호’는 출항을 강행한 것이다.

 

결국 모든 악재를 안고 출항한 서해 훼리호는 당시 수화물을 갑판부분에 적재하여 배의 상부가 무거운 상태에서 키를 남쪽으로 갑자기 돌렸을 때 복원력 상실이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하여 침몰되어 버렸다.

    

▲ 서해 훼리호 참사와 세월호 참사는 막을 수 있던 ‘인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사진=MBC 캡처> 

 

늦어진 대처

 

또한, 사고 직후의 늦어진 대처 또한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선장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둘째치고라도 항해사가 당시 휴가 중이었던 터라 갑판장이 항해사의 업무를 대신했으며, 안전요원도 고작 2명 뿐이었다.

 

항해사는 선적하는 짐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진 전문 직급이라, 넘치는 인원과 짐에 대해 제동을 걸어야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선장이 있으니 되지 않겠느냐 싶겠지만, 보통 선장은 그저 보고받고 사인만 할 뿐이기 때문에 사고의 위험이 극도로 높았던 상황이 전개됐다.

 

또 사고 직후 위급상황임을 알린 사람도 없었으며 구조 요청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인명피해를 더욱 키운 원인이 되었다. 먼저 인명구조에 나선 사람들이 사고지점 부근에 있던 어선들이었다.

 

해양경찰, 119 구조대 등은 사고가 발생한지 거의 한시간 만에 도착했다. 이 당시에는 휴대전화가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유선전화기를 쓸 수 밖에 없었는데, 하필이면 침몰 중이라서 유선전화기가 작동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배의 내부에는 발전기가 있는데, 침몰 중에는 발전기도 침수되기 때문에, 전기가 끊길 수 밖에 없었던 구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경이나 소방 선박이 더 늦게 온 것은, 당연히 ‘해양’이라는 특성이 작용하기도 했다. 선박의 속도 한계상 항시 ‘해군 고속정’이 호위로 붙는 서해 5도(백령도, 연평도 등) 여객선이 아닌 한, 신고 사인을 받는다고 해서 현장에 몇 분 안에 나타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같은 복합적인 원인으로 촉발된 인재인 ‘서해 훼리호 참사’는 탑승객 총 362명 중 무려 292명이 사망하는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당시 여객선 회사 측이 승객을 무리하게 초과승선시킨 바람에 시신이 무리지어 발견되는 등 워낙 인명 피해가 심했기에, 사고 당시 신문에는 사신이 여객선을 유혹하는 내용의 풍자만화가 실리기도 했다. 당시 한 언론에 기재된 만평의 내용으로는 파도가 높게 휘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사신이 “이제까지 괜찮았잖아, 괜찮아 출항해 옳지, 옳지”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인명참사로 이어진 큰 문제점으로는 ‘구명장비’의 관리 문제였다.

 

게다가 긴급한 상황에서 중요한 구명 장비는 제대로 동작조차 하지 않았다. 갑자기 배가 기우뚱거리다가 침몰해서 구명 장비를 꺼낼 틈도 없었다. 안전요원도 두명 밖에 없어서 빠른 대처는 사실상 힘들었다.

 

이에 몇몇 사람은 침몰할 때 구명 장비가 있는 문 유리를 깨서 이용하여 목숨을 건진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구명 장비가 없어 아이스박스에 매달려 목숨을 건진 사례도 있어 ‘배를 탈 때는 아이스박스를 가져가야 한다’는 뼈 있는 유머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안정장비에 대한 문제점은 앞뒤에 발생한 참사들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던 문제다.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가 발생하기 20년 전의 있었던 ‘남영호 침몰사고’ 때에도 바다에 떠다니던 귤 박스를 부여잡고 매달려 살아난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 20년 뒤의 발생한 ‘세월호 참사’에서는 구명 장비를 비치해놓고도 전달이 제대로 안 되거나 작동을 하지 않아 많은 고등학생들이 희생됐다.

 

결국 ‘구명 장비의 관리’에 있어서 정말로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다만 갑작스런 해상 사고를 당했을 때는 아이스박스같이 부력이 큰 물건에 매달려 있는 것이 대처 요령 중 하나로 꼽히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명 장비 관리 소홀의 문제가 적어지는 것은 아니다.

    

▲ 기자들이 도주했다고 보도한 서해 훼리호의 백운두 선장은 사고 발생 5일 후에 무선통신실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는 대한민국 언론의 대표적인 오보 사고로 기록되고 있다.

 

반복된 참사

 

이같은 ‘서해 훼리호’ 사고는 공무원들의 피해가 컷다.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는 간부급 직원 10명을 잃었고, 전주시 서서학동사무소 역시 동장을 포함 직원 9명을 잃는 참변을 당했다. 또한 육군본부 역시 영관급 장교 10여 명이 사고 선박에 탑승했다가 참변을 당했고, 그밖에 한국통신(현 KT), 충북대학교, 부안경찰서 소속 직원들도 단체로 여행을 왔다가 사고를 당했다.

 

사고 초기에 구조 작업에 앞장섰던 위도 주민들 역시 60여 명의 이웃 주민들을 사고로 떠나보내는 비통한 분위기 속에서도 실종자 수색 및 시신 인양 작업에 참여, 사고 수습에 협조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월호 참사 때도 드러났다 시피, 선박 침몰 사고의 경우 시신 수습이 전부 안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사건은 의외로 사망자 전원의 시신을 회수했다. 사람들이 탈출할 틈도 없이 배가 순식간에 뒤집혀 상당수의 인원이 배 안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뉴스를 본 사람들의 뇌리에 생생히 박힌 장면으로 선박 근처에서 짐과 쓰레기에 뒤섞여 바다에 떠다니는 시신들의 모습이다.

 

다만 서해 특성상 거센 조류 때문에 유실된 시신도 꽤 있었음에도 모든 시신을 인양한 것은 당시 재빠르게 특수부대를 투입한 정부와 ‘기적’이 합쳐진 결과물이었다.

 

이처럼 ‘천운이 따라서’ 모든 탑승인원의 시신이라도 건졌으나, 사고 당시 정확한 승선 인원 및 승선자 신원 파악에 어려움을 겪었던 문제때문에 사고 이후 그동안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던 승선자 인원 통보 및 신원 증명 규정이 강화됐다.

 

당시만 해도 출항 시간이 임박했을 때까지 승선권을 끊지 못했을 경우 먼저 승선한 후 배 안에서 승선권을 끊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승선권 선내 판매가 금지됐다. 또 모든 여객선은 운항 거리를 불문하고 출항 직전에 승선 인원을 통보하게 됐다. 여객선 승선권을 구입할 때 성명,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 신원 정보를 반드시 기입해야 하는 것도 이 사고를 계기로 이루어진 조치 중 하나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참사에도 드러났다시피 승선원 명부의 정확성 문제, 차량탑승 미신고자 등 여러 예측 불가한 상황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이런 큰 사건이 있었음에도 정부 및 정치권에서는 선박의 안전을 강화하기 위한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결국 역사는 더 반복됐다.

    

기자들의 작태

 

한편,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에서는 ‘한국 언론 보도 행태’의 추악함도 드러났다. 확인되지 않은 속보 전쟁으로 치명적인 오보를 쏟아냈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서해 훼리호의 선장이었던 백운두 씨에 대한 오보로 ‘선장이 혼자 탈출해 집으로 갔다’는 것과 ‘선장이 일본으로 밀항했다’는 보도였다. 이같은 보도로 인해 검찰, 경찰도 이 오보를 믿고 수사대를 급파, 전경 3개 중대를 동원하여 위도와 식도 일대를 수색하는 한편, 과실치사 혐의로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는 오보였고, 기자들이 도주했다고 보도한 백운두 선장은 사고 발생 5일 후에 무선통신실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게다가 선장과 함께 도피 의혹을 받고 있던 갑판장과 기관장 역시 사망이 확인됐다. 무엇보다 선장의 발견 위치가 통신실인 점으로 미루어 선장이 구조 요청을 시도하려는 찰나에 배가 전복된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시체가 발견되기 전까지 상처입은 유가족들에게는 보상해 줄 방법이 이미 없었다.

 

‘서해 훼리호 오보 사건’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언론계의 ‘대형 오보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유족들이 선장의 시신이 발견된 뒤 찾아온 기자들에게 “당신들이 살아있다고 했으니, 이제 우리 아버지를 살려내시오”라고 언론 오보를 꾸짖었고, 언론 관련 시민단체들은 이 보도가 나온 날을 ‘언치일’(언론 치욕의 날)로 정하자는 운동도 벌였다.

 

게다가 언론의 오보를 곧이곧대로 믿고 선장의 행방을 추적하던 검찰, 경찰 역시 톡톡히 망신을 당해야 했다. 이같은 언론의 행태는 ‘세월호 참사’ 때에도 그대로 재현되어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이후 ‘서해 훼리호 오보’는 지난 2014년에 방영된 이종석, 박신혜 주연 드라마인 ‘피노키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penfree1@hanmail.net

기사입력 : 201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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