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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은 필연, ‘유신의 유산’ 박근혜

공주로 살아오다 여왕이 된 ‘혼군의 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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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 기자 2017-09-29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선고가 다가온 가운데, 검찰이 구속영장을 연기하는 등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특유의 불통으로 여전히 자신의 죄가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뻔뻔하기까지 한 박 전 대통령은 공주로 살아오다 여왕이 된 여성은 결국 ‘혼군’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백성들에 의해 축출됐다. 과거 이야기 또는 영화 속의 스토리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이야기다. 유신독재 박정희의 딸인 대통령 박근혜는 어린시절 영애로서 공주의 삶을 누려오다 어머니 사후 퍼스트 레이디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아버지 사후에는 한동안 잠잠히 살아오다 90년대 말 정계에 복귀, 당 대표를 거쳐 대통령까지 하는 등 다시금 국가 수장의 자리에 올랐다. ‘드라마틱한 왕족의 삶’을 살아온 대통령 박근혜는 끝까지 구설수의 오르는 진정한 이슈 메이커가 됐다.

 


 

대구에서 태어나 광주로 이사…서울에서 줄곧 생활해

박정희가 설계한 최태민 따른 朴…개신교 보수화 노려

IMF 계기로 정치입문…‘노무현 탄핵’ 사태로 입지상승

역대 최다표 받은 대통령…최순실 게이트로 함께 몰락

 

▲ 지난 세월동안 공주처럼 살아온 대통령 박근혜의 선고일자가 다가오면서, 헌정 사상 최악의 ‘국정 농단 범죄자’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높아졌다. 사진은 지난 2013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식 당시의 모습. <사진=KBS 뉴스 캡처>

 

[사건의 내막=김범준 기자] 건국 이래 최악의 스캔들로 기록될 ‘박근혜·최순실 스캔들’의 핵심인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선고공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르면 11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선고가 열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에 검찰 측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박 전 대통령의 구속 기간을 늘리며 총력전을 예고하고 있다.

    

구속영장·선고공판

 

검찰은 지난 9월2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박 전 대통령 공판에서 27명에 대한 증인신청서를 제출하고 재판부에 추가 구속영장 발부를 요청했다.

 

검찰은 “10월10일부터 10월30일까지 12번 기일에 걸쳐 27명 증인을 순차적으로 신문하고, 그외 다수의 신문도 필요해서 구속기한인 10월 16일 24시까지 증인신문을 종료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국정농단의 정점에 있는 사안이 중하고 현재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부인하며 검찰의 증거에 부동의하고 있어서 추가 증거가 필요하다”며 “(기존) 구속영장 발부에 (기재)되지 않은 (SK‧롯데 관련) 뇌물수수 부분에 대해 구속영장 발부를 요청한다”고 밝혔다.

 

박 전 대통령 변호인인 유영하 변호사는 즉각 반발했다. 유 변호사는 “SK와 롯데 뇌물수수는 재판부에서 심리를 끝냈다”며 “구속은 수사의 필요성에 따라 수사단계에서 형사소송법에 따라 영장이 발부된다. 재판단계에서 이미 심리가 끝난 사건 때문에 추가 영장이 필요한지 재판부가 판단해 달라”고 말했다.

 

이어 “저희도 추가 의견서를 제출하겠다”며 “법정에서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을 아꼈다.

 

재판부는 “검찰은 추가 구속영장 발부를 원하고 변호인은 필요없다고 한다. 그래서 추가 구속여부를 가릴 청문절차를 가져야 한다”며 “청문절차는 10월 10일 재판 말미쯤에 의견진술 절차를 하겠다”고 밝혔다.

 

검찰의 증인신문 계획 등을 종합할 때,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선고기일은 추가 구속여부와 무관하게 이르면 11월말쯤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공주의 어린 시절

 

이처럼 선고공판이 다가온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무죄’는 사실상 기적에 가까운 상황이 됐다. 이미 뇌물관계로 엮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상황에서, 그 뇌물을 받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혐의는 무겁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 세월을 ‘고고한 공주’처럼 살아온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삶은 ‘국정 농단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것이다.

 

이같은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1952년 2월2일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 5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군인이었던 아버지 박정희의 부임지를 따라 이곳 저곳 이사를 다녔다. 첫 돌은 전남 광주시 동명동 셋방에서 맞았다. 1953년 여름엔 서울 동숭동으로 올라왔지만, 1954년 10월엔 다시 광주로 내려가 1955년 7월 박정희가 사단장을 달기 전까지 자랐다.

 

그러다 서울 충현동(신당동)에 집을 마련한 1956년 4월 이후에는 서울에 정착하게 된다. 이는 박근혜가 대구 태생이지만 전국을 돌아다녔던 턱에 대구 사투리를 쓰지 않고, 충북 옥천군 출신인 육영수 여사의 영향을 받아 충청도 사투리 억양이 살짝 섞인 서울말을 구사하는 요인이 된다.

 

1964년 2월 서울장충초등학교를 졸업한 박근혜는 성심여자중학교를 입학했다. 논란의 시작은 이때부터 인데, 중학교 진학 때 특혜를 받은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1964년 3월 성심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입시를 치러 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전 과목 모두 시험을 보았다. 그런데 박근혜가 중학교 입시를 치를 때는 2과목(국어, 수학)만 보았고, 박근혜는 성심여자중학교에 합격했다. 이듬해부터는 다시 전과목 모두 시험보는 것으로 바뀌었고, 중학교 입시는 1969년에야 폐지됐다.

 

또 박근혜가 서강대학에 입학하면서 누군가의 힘으로 종합대학인 서강대학교가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내용이다. 서강대학교 종합대 인가는 1969년 12월에 이미 이뤄졌고, 박근혜는 1970년 1월에 서강대 시험을 응시했다. 종합대학교 개교는 신학기 시작에 맞춰 1970년 3월에 이뤄진 것을 박근혜 입학 후 종합대학교 인가가 난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박근혜의 서강대학교 학부 졸업시 학점은 4.0 만점에 3.82로 상당히 높았다. 그러나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이산화가스라고 잘못 말하거나 센서 달린 신발을 인공지능의 사례로 혼동하는 등 과학기술에 무지해 보이는 박근혜의 발언들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게 박근혜의 학점 논란이다. 박근혜는 3학년 1학기까지 대개 A를 받으면서 B, C가 더러 섞여 있었으나, 유신 이후부터 전과목 A를 받는다. 그 밖에 박근혜를 수석 졸업자로 만들기 위해 졸업하던 때에 수석 졸업자 선정 방식이 바뀐 정황도 존재한다.

 

이후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떠났으나, 재학 도중 어머니 육영수가 피격으로 사망하자 귀국, 공석이 된 퍼스트 레이디를 대행했다. 퍼스트 레이디가 되기 전부터 대통령의 딸로서 여러 외교 행사에 참가해, ‘소녀 외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 최태민과의 만남은 대통령 박근혜에게 있어 결국 비극으로 끝나게 됐다. 사진은 지난 1976년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대한구국선교단 야간진료센터를 방문해 최태민 총재(오른쪽)와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 가운데는 박근혜 당시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 <사진출처=연합뉴스> 

 

최태민과 인연

 

문세광 한테서의 육영수 여사의 피살 이후, 육영수 여사가 자신에게 빙의되어 딸을 도와주란 말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최태민과 인연을 맺었다. 박근령·신동욱 부부의 증언에 따르면, 박근혜는 육영수 여사 피살 전부터 최태민과 알고 지냈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되고 “그런 사람과 가깝게 지내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최태민과 친한 관계를 맺게 되고 그가 발족시킨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를 맡았으며, 이후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를 바꾸고 영세교의 최태민, 구원파의 유병언과 함께 사회운동 '새마음 운동'를 주도했다. 이 과정 중에서 최태민의 5녀인 최순실과도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최태민과의 인연을 사실상 박정희가 이어준 게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당시 문익환 목사 등 대한민국 내 주류를 차지했던 진보적 기독교계를 견제하기 위해 최태민을 내세워 보수 기독교 단체를 강화한 게 아니냐는 분석인 것이다.

 

이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최태민 등의 국정농단을 이유로 박정희를 저격한 10.26 사건으로 박근혜는 청와대에서 나왔다. 이 과정에서 지금으로 환산하면 수백억에 달하는 6억을 전두환에게 받은 것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후 최태민 일가와 함께 교육 및 문화사업에 매진하게 된다. 지난 1980년 영남대학교,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자리에 올랐고 영남대 이사장에서는 1988년 사임했다. 한국문화재단은 2012년 해산될 때까지 줄곧 이사장 자리를 유지했다. 영남대학교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던 1982년, 육영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1990년 사임했다.

이같은 전두환 정권시기에는 정통성이 부족한 5공 정부에서 자신들의 흠을 메꾸기 위해 독재자인 박정희를 비난하던 상황이었다. 박근혜는 이 때를 자신의 인생 최대 암흑기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1981년 경에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육대학원의 석사과정(M. A. in Ch.Ed.)을 한 학기 다녔던 것이 당시 재직하던 교수들로부터 확인되기도 했다.

    

정치 입문기

 

중앙정치와는 먼 삶을 살아오던 박근혜는 199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이회창 지지 선언들 통해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당시 박근혜는 1997년 IMF 파동을 본 후 두고 볼 수 없어 정치를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8년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나가 국회의원이 되었다. 2000년, 부총재에 올랐지만, 이회창과의 갈등으로 2002년 제3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탈당을 하여 선진 여성정책의 구현과 양성평등을 기본정책으로 하는 신당,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오래 가진 못했고 2명의 광역자치의회의 의원 당선자를 낸 뒤 그 해 대선 직전에 한나라당과 합당하였다.

 

당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방북하여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하기도 했는데, 무단 방북이란 논란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허가를 받아 갔다. 그리고 2005년에 대표 명의로 김정일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공개되면서 통일부 허락의 문제와 북한에서 쓰는 주체라는 연호를 써서 국가보안법 위반 문제가 번지고 있다.

 

이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노무현에게 패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자, 한나라당에는 박희태 체제, 최병렬 체제 등이 들어섰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차떼기 파동(불법 대선 자금)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지역 구도 타파와 전국 정당을 표방한 열린우리당에 한나라당 내 개혁파 인사 김부겸, 이우재, 김영춘, 이부영, 안영근 등이 가담하면서 한나라당 소속 박근혜 의원 또한 정치적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이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공격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 당시 탄핵 서류를 제출하였고, 박근혜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에 참여하였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잘 알려졌다시피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시절인 1972년에 법무부 과장으로서 유신 헌법의 초안작성에 핵심적인 역할로 관여하였고, 유신 정권 말기에는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인연이 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탄핵은 ‘우리가 뽑은 대통령인데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탄핵을 하느냐’는 수많은 국민들의 격노를 불러 일으켰고 새천년민주당에 이어 한나라당까지 엄청난 여론의 역풍에 휘말려 17대 총선은 열린우리당이 단독 과반은 따놓은 당상이고, 잘 하면 180석~200석까지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최병렬 대표가 사퇴하고, 박근혜 의원이 당대표에 올라 사태 수습과 선거 지휘에 나섰다. 차떼기로 모금한 돈을 되갚기 위해 당사를 매각하고 ‘천막당사’를 차렸다. 또 당내 소장파들이 탄핵 찬성 철회를 주장했으나, 이를 거부하여 지지층 이탈을 막는 한편, 거대 여당 견제를 부동층에 호소했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이를 막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반등했다. 그 결과 열린우리당은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152석을 얻어 처음으로 원내 제1당 자리를 차지하는 기쁨을 안았으나, 180석~200석까지도 기대해볼 만하다는 분위기로 볼 때 솔직히 실망스럽다는 평가를 받았고, 80석이라도 확보하면 다행이라던 한나라당은 기대 의석을 훨씬 웃도는 121석을 확보하며 기사회생했다.

    

▲ 최순실(왼쪽)과 박근혜 전 대통령(오른쪽)의 40여 년 넘는 인연은 결국 최악의 배드엔딩으로 결말 짓게 됐다. 사진은 지난 1979년 6월10일 제1회 새마음 제전 당시 모습. <사진출처=뉴스타파 영상 캡처>  

 

실패와 리벤지

 

이후 박근혜 대표는 참여정부의 모든 정책에 반대하며 참여정부를 가열차게 공격하였고, 전국적인 촛불집회를 통해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이로써 그는 한나라당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고, 가장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2007년 참여정부는 레임덕이 왔다. 노무현의 지지율은 상향세였지만, 야당이나 대권 주자들의 지지도가 그보다 더 높았던 것이다.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가 잡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이 유력할 상황이었으나, 독재자의 딸이라는 거부감, 참여정부와의 대립 과정에서 보인 강경함은 지지율 외연 확장에 방해가 되고 있었고, 당내 지지는 다소 부족했지만, 국민적 인기가 높았던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강력한 경쟁 상대로 떠올랐다.

 

이 당시 분위기는 한나라당의 대선 승리가 거의 확실했기 때문에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사람이 곧 다음 대통령이나 다름 없었던 그런 분위기였고, 결국 박근혜는 패배해 대통령 이명박 당선을 보게됐다.

 

그리고 17대 대선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18대 총선이 시작되자 이명박 대통령의 계파인 친이계는 박근혜 의원을 따르는 친박계 인사들을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켰다. 이에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계 인사들은 한나라당을 나와 친박연대라는 사상 초유의 가설 정당을 만들어 18대 총선에 출마했고, 친박연대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은 '친박 무소속 연대'라는 이름으로 출마했다.

 

이때 박근혜 의원은 한나라당 공천 심사에서 합격했으나 말 그대로 팔다리가 다 잘린 상태였고, 기자회견을 연 뒤 눈물을 보이며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습니다”라는 말을 남긴다. 또 탈당한 친박계 사람들에게 ‘살아서 돌아오라’는 메세지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 후 전세는 역전되게 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만료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의 인기도 덩달아 바닥을 찍어, 땅 속을 뚫기 시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퇴한 후 치러진 선거에서 친이계 나경원이 박원순에게 패배하면서 급속도로 이명박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갖가지 당내 비리로 인해 위기에 빠진 당을 구하는 임무를 박근혜가 맡았다.

 

이후 당의 전권을 거머쥔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당 이름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18대 총선 때 겪었던 수모를 고스란히 친이계 공천 학살로 되갚아줬다. 그런 가운데 치러진 19대 총선은 민주통합당이 승리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새누리당의 승리로 끝나 박근혜라는 이름의 가치를 최대치까지 올려놓았다.

    

탄핵 대통령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박근혜 의원은 18대 대선에 출마할 것임을 공식 선언했다.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은 박근혜 의원의 싱거운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2012년 18대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가열찬 대결을 펼친 끝에 51.6%의 득표율을 얻어 18대 대통령에 당선, 숙원을 풀게 되었다. 역대 대통령 후보들 중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후보였다.

 

하지만 대통령 집권 후에는 각종 실정과 최순실과 연관된 수많은 비리 행위의 주범으로 찍혀 ‘탄핵 대통령’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penfree1@hanmail.net

기사입력 : 2017-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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