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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최후의 날, 10.26사건 김재규 재평가 막후
딸이 무너뜨린 신화…“중정부장은 왜 총 들었나”
김범준 기자   |   2017.10.26 [00:00]

탄핵된 대통령 박근혜의 아버지이자 19년간 우리나라를 통치해온 박정희는 지지자와 반지지자의 평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이다. 강압적인 군사독재와 유신헌법 제정으로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후퇴시킨 반면, 경제발전을 시켰다는 긍정적인 평을 동시에 듣는 것이다. 또한 그 기나긴 통치기간 동안만큼이나 수많은 에피소드가 존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죽음의 그 순간까지도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회자되곤 한다. 올해 10월26일은 ‘논란의 박정희’가 사망한 지 38년째 되는 날이다. 특히 올해는 지난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평소와는 다른 ‘김재규 재평가’ 마저 거론되는 상황이다.

 


 

강압정치·경제위기·한미관계 악화로 ‘정권위기’ 찾아와

차지철의 도가 넘은 ‘월권행위’에 암살 계획한 김재규

결의 후 30분 만에 실행 옮겨…허무하게 죽은 박정희

분분한 암살동기…민주화 대한 열망으로 실행했을까?

 

▲ 김재규(오른쪽)은 박정희(왼쪽)가 신임하던 부하였다. <사진출처=동아일보 캡처>

 

[사건의 내막=김범준 기자] 10·26사건은 1979년 10월26일 저녁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사건이다. 이 같은 사건의 전말에는 그 시대의 복잡한 사정이 숨어있다. 1972년에 시작된 유신체제는 경제적으로 70년대 후반 누적된 성장 드라이브 정책의 후유증과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운명의 10월26일

 

정치적으로는 1인 장기집권에 의한 강압통치,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불화 등 정치 및 경제적 모순이 반정부 시위로 폭발하면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해 10월16일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나자,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이 부마민주항쟁의 처리문제로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10월26일, 궁정동 안가에서의 만찬 도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경호실장 차지철을 발터 PPK 권총으로 살해한 것이다.

 

사건 당일인 지난 1979년 10월26일, 박정희는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열린 삽교천 방조제 완공식과 KBS 당진 송신소 완공식에 참석한 후, 오후 2시 반경 청와대로 복귀하였다. 이 당진 송신소 건물은 중앙정보부에서 관리하는 건물인 바, 부장인 김재규가 당일 아침 완공식(삽교천 포함)에 참석할 의사를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전화로 밝혔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의 신임을 독차지하고 있던 차지철은 “지금 시국이 어느 때인데, 중정부장까지 자리를 비우면 어쩔 것이오? 김 부장은 그냥 서울이나 잘 지켜 주시오”라면서 단칼에 끊어버렸다.

 

그리고 이것이 이날 김재규가 사건을 개시한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4시경, 박정희로부터 대행사, 즉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그리고 경호실장 등이 참석하는 연회를 준비하라는 명을 받은 차지철은 경호처장 정인형을 통해 중정 안가 측에 대행사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경호실로부터 대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는 주방에 연회를 준비하라고 지시한 후 대행사를 도울 여성을 섭외했는데, 이날 섭외된 여성은 당시 모델 겸 배우 신재순과 가수 심수봉이었다.

 

오후 4시 10분쯤 남산 중정 집무실에서 차지철로부터 이날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가로 오라는 전화를 받은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도착한 후, 안가 집무실에서 오후 4시 40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궁정동에서 저녁이나 하면서 조용히 시국 얘기 좀 나누자”며 그를 초대했고, 중정 제2차장보(국내담당) 김정섭을 저녁 6시 30분까지 궁정동 안가로 오도록 했다. 한편, 이날 저녁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가 대행사에 호출되었다는 핑계로 연회장 옆의 본관 식당에서 김정섭 차장보와 저녁을 같이 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발터 PPK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놓았다. 전문가들은 김재규의 살의는 이때부터 발동된 것으로 추측한다.

 

오후 5시 20분,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이 먼저 안가에 도착했다. 김재규는 김계원과 안가 앞마당에서 부마항쟁 때 부산에서 직접 확인한 민심을 얘기하며 “부마항쟁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민란이다”라고 강하게 부르짖었다. 그리고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차지철이 부마항쟁을 신민당이 개입한 일부 불온세력의 주도로 벌어진 사건이라 호도했기 때문이라고 그를 심하게 비난하며 “차지철 이 자식 오늘 해치워 버릴까요?”라는 등 격한 반응을 보였다. 평소 김재규를 친동생처럼 아끼던 김계원은 “나도 중정부장을 해봐서 알지만 김부장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내일 민정수석의 대통령 보고 때 차지철의 월권에 대해 각하께 보고하도록 하겠다” 면서 김재규를 달랬다.

 

오후 6시경, 박정희와 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과 김재규가 맞이하여 대통령을 나동의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운명의 만찬이 시작되었다. 대통령 수행차 안가로 온 청와대 경호실 직원 중 김용태 특수차량 운행계장, 박상범 경호계장, 김용섭 경호관은 나동의 주방에서 안가 직원들과 같이 맥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고, 정인형 경호처장과 안재송 부처장은 경호원 대기실에서 따로 저녁식사를 했다. 당시 중정 안가에서의 행사 시, 대통령 경호는 안가 경비원들에게 맡기고 경호원들은 별도 장소에서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이날, 만찬에서 술은 박정희와 김계원이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으로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하였다. 연회 당시 술 이외의 만찬 메뉴는 꿀에 재운 인삼과 송이버섯 구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도라지나물, 전, 생채, 편육 등으로 의외로 평범했다고 전해진다.

 

한창 연회가 진행되는 와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신민당 공작(김영삼을 총재직에서 몰아내고 정운갑을 총재 대행으로 올리려던 정보부의 공작)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묻자 김재규는 “당직에서 사표 내겠다던 의원들이 강경하게 돌아서는 바람에 다 틀렸다”라고 답했다. 이에 박정희는 부마항쟁과 김영삼 제명건을 들먹이며 “김영삼을 구속시켜야 했다”라고 강한 어조로 몰아붙였고 김재규는 “이미 제명당한 김영삼을 구속시키는 건 그를 두 번 죽이는 셈이다.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셔야지요”라면서 진언했다.

 

이에 짜증이 난 박정희는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야당 놈들 비리만 쥐고 있으면 다가 아니다”라며 김재규를 심하게 질책했다. 게다가 옆에서 차지철은 “야당 놈들 중 국회의원 하기 싫은 놈 하나도 없다. 까불면 학생이고 신민당이고 전부 탱크로 싹 깔아뭉개야 한다”며 맞장구를 치고 혼잣말로 “요새 정보부는 부마사태 처리도 그렇고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며 비아냥거리면서 김재규를 계속 코너로 몰고 갔다. 이런 살벌한 상황을 무마시키려 김계원 비서실장이 김재규에게 위스키로 칵테일 만드는 방법을 묻기도 하고 오늘 삽교천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는 등 화제를 전환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 지난 1979년 10월26일, 중앙정보부장 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를 총으로 살해했다.

 

암살당한 박정희

 

이런 분위기는 저녁 6시 30분 쯤 신재순과 심수봉이 연회장에 들어오면서 누그러졌지만 이미 뚜껑이 열린 김재규는 연회장을 나와 김정섭 차장보와 저녁식사 중이던 정승화 총장에게 가서 “갑자기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다. 김 차장보가 국내 정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와 시국 이야기 좀 나누고 계시라. 끝나는 대로 곧 오겠다”라며 해명을 한 후, 집무실 책장에 숨겨놓은 자신의 발터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이던 의전과장 박선호(김재규가 체육교사를 하던 시절 김재규의 제자)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김재규의 6사단장 재임 당시 전속부관)을 안가 마당으로 불러내 명령을 내렸다. 차지철과 함께 박정희를 암살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며 30분 안에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김재규는 박흥주를 향해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라고 중얼거리고는 권총이 든 호주머니를 탁 치면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는 처음엔 크게 놀랐지만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고,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예비역 해병 하사 출신. 평소 박선호의 신임이 깊었다)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을 암살조에 합류시켰다.(참고로 유성옥은 육군 중사 출신으로 제대 후 중정 운전사로 취직했다가 박선호의 도움으로 1급 근무지인 안가로 배치되었으며, 그는 그해 11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현장에서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은 안가 나동 주방 근처에 세워둔 승용차 내부에 숨어서 연회장에서 총소리가 나길 기다렸다. 한편 박선호는 경호원 대기실에 있던 정인형과 안재송을 처치할 준비를 했다. 사실 박선호는 이 둘을 사살하기보다는 잘 설득하여 어떻게든 죽이지 않고 살려볼 속셈이었다.

 

저녁 7시 38분경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재규는, 7시 40분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발터 PPK를 꺼내어 차지철을 향해 “차지철 이 새끼, 넌 너무 건방져!”라고 외치며 제1발을 발사했고,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시켰다. 김재규의 당시 발언엔 두 가지 설이 존재했는데, 이것은 소수설이었으나 지금은 이것이 정설이다. 흔히 알려진 다수설은 신재순의 진술에 의거한 것으로, 김재규가 사격 직전 김계원에게 “각하를 똑바로 모시라”라고 충고한 후 박정희에게 “각하, 차지철 저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라면서 발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때 논란이 되었고, 이로 인해 의자매까지 맺으며 친밀했던 신재순과 심수봉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결국 신재순의 버러지 발언을 포함한 다수설은 합동 수사본부 측의 강권으로 거짓 증언한 것임이 최근에 밝혀졌다.

 

갑자기 저격당한 차지철은 총탄에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김 부장, 왜 이래!”라고 외쳤고, 박정희가 “지금 뭐하는 짓들이야!”라며 일갈하자, 김재규는 3~4초쯤 후 엉거주춤 일어선 상태로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에 제2발을 발사했다. 뒤이어 당황하는 차지철에게 김재규는 제3발을 쏘려 했으나 발터 PPK가 격발 불량을 일으켜 발사되지 않자 밖으로 뛰어나갔고 차지철은 화장실로 피신해 버렸다. 그리고 우측 흉부 관통상을 입은 박정희는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정좌하고 있다가 신재순이 “각하! 괜찮으십니까?”라며 부축하려 하자 박정희는 “난 괜찮아”라고 중얼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김재규의 제1발을 신호로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 일행은 소지한 권총과 소총으로 주방에서 식사 중이던 김용태 경호실 운행계장과 김용섭 경호관을 사살했고, 그 과정에서 안가 요리사 이정오가 허리에, 식당차 운전사 김용남이 어깨에 총을 맞는 등 안가 직원 몇 명도 부상을 입었다. 그 난리 중에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계장 박상범은 허벅지 관통상만 입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총을 맞고 쓰러질 때 주방 조리대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 완전히 의식불명이 되어 죽은 것으로 오인되었고, 안가 경비원인 김태원의 확인 사살 시 박상범 옆에 안가 직원 김용남이 부상을 입고 누워 있어 사격을 포기한 행운도 따랐다.

 

게다가 청와대 경호원들은 대개 소행사 때마다 안가의 중정 직원들과 마주치다 보니 친분이 두터웠고 막역한 친구 사이인 경우도 많았던 바, 김태원으로선 친하게 지내던 경호원에게 쉽사리 총구를 들이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박상범은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에도 계속 경호실에서 근무했고, 김영삼 정권 출범 때 경호실장으로 임명되어 최초의 민간인 출신 경호실장이 되었다.

 

같은 시각 경호원 대기실에서 마른안주를 먹으며 AFKN TV 방송을 보고 있던 정인형과 안재송이 총소리를 듣고 뛰어나가려 하자 박선호가 권총으로 제지하며 “움직이지 마라, 제발 우리 같이 살자!”라고 애원했지만 안재송이 총을 뽑으려 했고, 어쩔 수 없이 박선호는 안재송을 사살한 데 이어서 친구인 정인형도 살해하고 말았다.

 

밖으로 나온 김재규는 정인형과 안재송을 처치하고 나온 박선호의 리볼버를 넘겨받아 연회장으로 돌아왔고, 화장실에서 나와 경호원을 찾던 차지철은 김재규와 맞닥뜨리자 문 옆의 문갑을 치켜들고 거세게 저항했으나, 김재규는 차지철의 복부에 총을 발사하여 치명상을 입혔다. 차지철을 거꾸러뜨린 김재규는 쓰러져 있는 박정희에게 후두부를 향하여, 마지막 탄을 발사해 그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

    

암살의 이유는?

 

결국 박정희는 ‘19년 철권통치’라는 타이틀에 비하면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 같은 암살의 배경으로는 크게 3가지가 지목된다. 우선 박정희가 차지철이 내세우던 강경노선 쪽으로 손을 들어 주었고, 이에 기세등등했던 차지철은 대통령 경호라는 임무를 넘어서서 중앙정보부의 영역까지 손을 대려고 하는 월권행위를 일삼았다. 이에 대통령 측근들이 차지철의 월권을 경계하는 충언을 했지만, 그때마다 박정희는 “차지철이 국회의원을 해 봐서 정치를 잘 안다”라고 오히려 두둔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입지가 좁아져 거세 위기에 놓인 김재규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설도 유력하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음모라는 설도 있으며, 김재규가 순간적인 분노를 못 이겨 충동적으로 저지른 우발적 살인이라는 설 또한 제기되고 있다. 또한 당시 박근혜 영애 근처에서 얼쩡되던 최태민을 보고 나라의 미래를 걱정했다는 설마저 존재한다.

 

하지만, 위와 같은 설명들은 모두 김재규 개인의 의사에 크게 기대거나, 음모론에 그치고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당시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전국의 대도시로 뻗어나갈 가능성이 높은 민란으로 파악하여 박정희에게 보고했지만, 박정희와 차지철은 북한 간첩의 개입 내지는 김영삼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불순한 사건으로 호도하고, 대형 학살을 예고하는 언행을 보였다.

 

즉, 부마민주항쟁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될 경우, 군부대를 동원하여 강경진압에 의한 유혈사태가 터질 확률이 높았다. 이런 사실들을 보았을 때, 민주화에 대한 사회적 열망이 김재규라는 방아쇠로 나타났을 확률은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당시 김재규가 민주화 운동 자체를 지지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민주화 세력에 대해 온건한 대응을 검토하는 수준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정희 살해범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많아지고 있다. 사진은 책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김재규 재평가?

 

이같은 김재규의 ‘민주화운동 지지설’로 인해 의사(義士)로서 재평가 해야한다는 일부의 목소리는 간간히 있어왔다. 특히 박근혜 정부 집권 이후 박근혜의 실책에 대한 반발, 조롱으로 ‘의사 김재규’라는 유머가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다만 이 또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어디까지나 ‘풍자’였고, 그가 진짜 의사라고는 믿지 않는 사람이 다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정 사상 초유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근혜가 보여준 후안무치한 행각과 헌법부정으로 인해 ‘딸인 박근혜가 저 정도인데 이미 초법적인 수단으로도 스스로 내려오지 않을 박정희를 강제로 끌어내리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양지의 대중들을 향한 그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이 움직임으로 인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정치에 관심이 많은 집단 사이에서 김재규에 대한 ‘진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 의사 김재규 드립을 더이상 풍자로만 쓰지 않게 되었다. 혹자가 평하길 ‘박근혜가 박정희 신화에 금을 냈다’라고 했는데 동시에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도 불러일으킨 상황이다.

 

실제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직후인 2016년 말부터, 인터넷 상에선 김재규 의사라고 불리기도 하며 그에 대한 드립과 진지한 논쟁이 지속해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지난 2013년 김재규와 10.26 사건에 대한 재평가가 담긴 평전인 문영심 작가의 <바람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역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부상한 대중의 김재규 재평가 여론과 맞물려 빛을 발하며 배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2016년 12월17일 대한민국의 유력 일간지이자 진보매체 중 하나인 <경향신문>에 박근혜가 묻어버린 ‘박정희 신드롬’라는 기사가 올라오고 기사의 상당부분이 김재규 재평가에 대한 내용이 할애되는데 이르렀다.

 

또한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과거 발언내용들도 주목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몇 년 전까지는 김재규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나, 지난 2013년 5월17일 <한겨레> 기사를 통해 재평가 여지가 있음을 밝혔고, 2016년 12월17일 경향신문 기사에서도 마찬가지 입장임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 기사를 참고하면 한 교수는 지금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쳐내는 시기라고 규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한홍구 교수는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아무튼 이 10·26 사건은 유신체제가 붕괴되는 교두보였으며, 한편으로 전두환 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penfr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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